다시 증폭된 외국인 혐오, 불평등, 정치적 불확실성

임형두 / 2021-11-30 08: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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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도널드 서순의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다시 증폭된 외국인 혐오, 불평등, 정치적 불확실성

역사학자 도널드 서순의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책의 표지 그림이 암울한 듯 미묘하다. 영국 화가 조지 프레더릭 와츠의 작품 '희망(Hope)'이다. 그림 속 여자는 눈을 가린 채 허름한 옷차림으로 지구 모양의 공 위에 앉아서 현이 하나뿐인 민속악기 리라의 희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어두운 상황에서 그 소리로나마 위안을 얻으려는 걸까? 지옥은 코앞에 다가온 게 아니라며 여전히 희망을 품은 듯하다. 병적 징후들이 넘쳐나지만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시대가 병들었어도 끈질기게 싸워가는 사람들 덕분이다.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희망을 낳는다.

이 작품은 1930년 파시스트 감옥에서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안토니오 그람시가 남긴 고찰의 글을 떠올리게 한다.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위기는 생겨난다. 이 공백기에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난다."

외국인 혐오와 불평등, 정치적 불확실성, 기후변화, 환경파괴, 전 지구적 팬데믹, 극우 포퓰리즘 등이 늘어만 가는 세태다. 이 같은 상황에서 평범한 희망을 품기란 어렵다.

영국 런던대 퀸메리 칼리지의 도널드 서순 명예교수는 이런 병적 징후들을 추적하면서 오늘날의 위기를 진단한다. 저서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은 영국과 유럽 등 서구를 중심으로 살펴보되 시야를 세계 곳곳으로 넓혀나간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태어난 그는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미국 등지에서 공부한 역사학자다.

그람시가 보기에 당시 자본주의는 헤어날 길이 없는 위기에 빠져들었지만,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체할 노동계급 세력은 아직 허약할 뿐이었다. 그 위기를 비집고 들어선 파시즘과 극좌 모험주의는 그람시가 생각하는 '새로운 것', 즉 자본주의 병폐를 극복할 사회주의가 아직 생겨나지 않은 공백기에 나타난 '병적 징후'였다.

서순 교수는 오늘날 죽어가는 낡은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생겨나 '영광의 30년'을 거치며 모습을 갖추고 냉전 종식 이후 세계를 지배하게 된 현대 자본주의라고 역설한다.

이 낡은 세계는 '성장과 안정, 교육 확대의 세계이자 젊은이들이 자기 부모보다 더 잘살고, 더 자유로우며, 도덕 관습의 제약을 덜 받을 것'이라고 자랑하는 세계였다. 완전고용과 복지, 사회서비스는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승승장구하는 자본주의가 낳은 68세대는 여성과 인종적·성적 소수자 등의 인권 향상을 위해 싸웠고, 성장과 더불어 자유와 평등을 더 많이 이들에게 확대해줬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냉전에서 승리하며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이 세계는 2008년 경제위기에 이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하는 가운데 허약한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20세기 후반부터 경제적 불평등은 계속 확대됐고 외국인 혐오, 인종주의 역시 나날이 기승을 부려댄다.

그뿐인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민주의가 정당성과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하던 정치는 어느 순간부터 막말과 혐오로 무장한 극우 포퓰리즘이 판치는 장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람시가 꿈꾼 새로운 희망의 시간일까? 동트기 전 이른 새벽의 어둠처럼 말이다.

저자는 마키아벨리의 다음 구절을 인용하며 의지의 낙관주의를 포기하지 말자고 당부한다.

"과거의 무질서를 인간의 본성 탓으로 돌리지 말고, 시대를 탓하라. 시대가 바뀌어 더 나은 정부가 세워지면, 우리 도시가 장래에 더 나은 미래를 누리리라는 희망에 합당한 근거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 놓인 공백기의 주요한 특징은 불확실성이라며 이는 '넓은 강을 건너는 것과 비슷하다'고 역설한다. 오래된 강둑이 뒤에 있지만, 반대편은 아직 또렷하게 보이지 않은 채 물살 때문에 뒤로 밀려 빠져 죽을 위험이 있어서다.

이 와중에서 발생하고 있는 테러리즘에 대한 인식도 다음과 같이 밝혀 주목된다.

"서구에서 우리는 무슬림 테러리스트들이 주로 서구인을 죽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들 손에 살해된 무슬림 수가 훨씬 많다. 테러리즘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나라를 꼽아보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나이지리아, 시리아 등이다. 서구에도 병적 징후가 숱하게 많지만, 다른 지역의 상황은 훨씬 좋지 않다."

유강은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 384쪽. 2만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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