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 세계를 바꿔놓은 제국주의, 노예제 그리고 전쟁

임형두 / 2022-06-22 14: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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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짐 다운스의 책 '제국주의와 전염병'
▲ 미국의 남부 목화 플랜테이션에 예속된 흑인 노예들. 열악한 의식주에 시달리며 강제노동을 하다 탈출한 흑인 노예의 아이들은 천연두 예방접종을 위한 백신 생산 도구로 쓰였다. [황소자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의학 세계를 바꿔놓은 제국주의, 노예제 그리고 전쟁

역사학자 짐 다운스의 책 '제국주의와 전염병'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알고 보면 현재 우리의 건강은 이름 없는 조상들의 피와 고통에 너무나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다만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의학이 광폭으로 발전한 때는 18~19세기였다. 번성하는 제국주의의 관료체제에 힘입어 의사들은 전 세계로 파견돼 의학적 위기에 대처하는 연구자로 변모했다.

이들은 유행병을 관찰하고 환경과 질병의 상관관계를 분석하며 혁신적인 치료법을 개발해냈다. 사례 연구와 통계 분석에 근거해 질병 양상을 규명하는 역학(疫學)은 이 시기에 크게 발전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공중보건 시대가 첫발을 뗀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의사들이 대규모로 임상을 진행하고 예후를 관찰한 대상은 누구였을까? 당시의 의학 혁명을 이끈 학자나 이론은 의학사에서 중요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사례연구의 현장 이야기는 깡그리 사라졌다.

미국 게티즈버그대학의 역사학 교수인 짐 다운스 박사는 미국의 노예제와 남북전쟁사를 중심으로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역사의 이면, 권력의 그림자에 가려져 잊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발굴하고 재해석해 들려준다.

신간 '제국주의와 전염병'은 역사 현장에서 의학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지만 기록이나 기억에서 지워져 버린 이들의 목소리를 깊이 발굴해냈다. 저자는 18~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흑인과 혼혈인, 노예와 식민지인, 죄수와 군인들이 전염병 연구와 역학 발전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야기한다.

노예제, 식민주의, 전쟁은 수많은 사람을 속박 상태로 몰아넣는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노예선, 플랜테이션(대규모 상업 농장), 전쟁터는 의사들이 질병의 확산을 관찰하고 질병을 발생시키는 사회적 조건들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특히 1756~1866년 사이에 이런 환경이 늘어나자 역학의 탄생에 기여한 의학 연구들이 활기를 띠었다.

책은 1756년 벵골군에 포로로 잡힌 영국 군인들이 수용인원 초과 상태인 인도의 감옥에서 무더기로 죽어간 이야기로 시작된다. 훗날 '캘커타의 블랙홀'로 알려진 이 사건을 통해 의사들은 사람들로 가득 찬 공간의 위험성을 섬뜩하게 인식했다.

'신선한 공기'의 필요성을 증명키 위해 의사들이 주목한 것이 노예선 브룩스호에서 토머스 트로터 박사가 작성한 보고서였다. 당시 해군 군의관으로서 노예선에 배치된 트로터는 배 밑바닥에 짐짝처럼 부려진 노예들의 실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숨이 턱턱 막히는 공간에서 쇠사슬에 묶여 신음하다 죽어가는 노예들을 관찰한 트로터는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 원인은 두 가지, 즉 '더러운 공기'와 '영향 결핍'이라고 판단했다. 노예들을 갑판으로 끌어내 신선한 공기를 쐬게 하고, 인근 섬에서 과일을 구해 먹이자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노예들의 건강을 보호해 '하자 없는 상품'으로 운송하라는 임무를 완수해낸 트로터는 이 경험을 살려 괴혈병 전문가로 발돋움한다.

하지만 트로터는 논문과 저서에서 '아프리카 노예선'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은 채 '수많은 사례'나 '선박' 정도로 용어를 뭉뚱그려 표기함으로써 제국주의와 노예무역의 폭력성을 지워버렸다. 이렇듯 의사들이 자신의 연구에 도움을 준 개인과 집단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는 일은 크림전쟁. 남북전쟁, 식민지 현장에서 숱하게 일어났다.

이번 책은 크림전쟁 현장을 누비며 현대 역학의 기초를 다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노예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치러진 남북전쟁에서 오히려 인종차별적 분류체계를 강화해 오늘날까지 질병을 인종 단위로 파악하는 악습을 만든 북부 의사들의 모순적 활동, 19세기 중반 전 세계로 퍼진 콜레라 대유행 등에 이르기까지 의학이 사회·역사적 변화와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아왔는지 탐색한다.

저자는 거듭 말한다. 제국주의와 노예제도는 현대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의료시스템의 DNA에도 깊이 각인돼 있다고.

고현석 옮김. 황소자리. 384쪽. 2만3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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